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베스 1세 (문단 편집) ===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스코틀랜드)|메리 여왕]]과의 관계 ===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여왕(스코틀랜드)|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의 오촌 조카로[* 엘리자베스의 고모 [[마거릿 튜더]]의 친손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메리가 잉글랜드로 망명했을 당시 그녀는 보스웰 백작과 간통하고 남편 단리 경을 살해한 혐의로 폐위당한 상태였고, 스코틀랜드의 왕위에는 메리와 단리 경의 아들 [[제임스 1세|제임스 왕자]]가 즉위한 상황이였다.[* 메리의 아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했을 당시에 고작 '''1살짜리 아기'''였다.] 그 이전에 메리는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로도 제위하고 있었지만, 프랑수아 2세가 메리와의 사이에서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두번째 남편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에 원래 메리의 친절한 언니를 자처하던 엘리자베스가 메리의 남편으로 다루기 쉬운 남자였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권한 바 있었다. 그러면서 더들리와 결혼해 낳은 후사에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준다는 조건도 함께 제시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본인이 독신을 선언한 것도 있지만 여러 이유로 더들리와 결혼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사이인지라 더들리의 아이에게라도 왕위 계승권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자신의 연인인 더들리를 스코틀랜드로 보내 스코틀랜드를 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더들리가 공공연히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알려진데다가 반역자의 후손이고 왕가와 혈연으로 이어지지도 않은 평범한 귀족에 불과했기에, 메리는 물론 그녀의 신하들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까지도 엘리자베스의 저 제안을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저 제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도 진지하게 권유한건 아니라고 하지만... 이후 메리 여왕이 풍채가 좋다는 이유로[* 메리 스튜어트의 키는 180cm에 달했기에 웬만한 남자보다도 더 컸다. 그래서 자신보다 키 큰 남편을 원했다고.] 고른 두번째 남편은 당시 잉글랜드 궁정에 있었던 [[헨리 스튜어트]](일명 '단리 경')이었다. 하지만 단리 경 또한 혈통상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단리 경의 외할머니가 바로 엘리자베스의 고모 [[마거릿 튜더]]다. 메리는 마거릿 튜더의 친손녀였으니 메리와 단리 경은 사촌 사이였다. 단리 경 역시 제임스 1세의 아버지이자 헨리 7세의 자손이므로 당연히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이 결혼으로 엘리자베스의 메리에 대한 감정이 더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단리 경이 결혼 직후부터 술주정으로 아내를 학대했기 때문에 사이가 단단히 틀어져, 메리로서는 엘리자베스를 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사생활 측면에서도 최악의 패를 뽑고 만 셈. 보스웰 백작과의 간통과 단리 경의 살해 혐의로 폐위당하고 감금되어 있던 메리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잉글랜드로 망명했으나 위에도 언급된 그녀가 가진 잠재적인 위협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일단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유폐시킨 후 감시자를 붙였다.[* 메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받은 솔즈베리 백작은 메리가 이후 처형당하기까지의 수십년간을 이 과중한 임무에 시달려야 했다.]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의 사이는 매우 미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평생 열등감과 우월감이 교차되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메리는 태어나자마자 여왕이었고, 한 때는 프랑스의 왕비였으며 왕족으로서 평생 대접받았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이 생전에 평판이 좋지 못했고, 어머니의 사후 [[사생아]]로 격하당하여 어린 시절을 상당히 불우하게 보냈다. 그러나 후에는 상황이 뒤바뀌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나라에서 지지받는 국왕이었지만 메리는 평판이 나빴고 이 당시엔 아예 자기가 다스리던 나라에서 쫓겨난거나 마찬가지였다. 내적으로는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가 가지지 못했던 외모와 교양, 귀족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구도 많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히스테릭하여 친구를 쉽게 만들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학문을 가까이 하고[* 무거운 [[그리스]]의 [[서사시]]나 [[라틴어]]로 쓰인 [[철학]]서 등을 즐겨 읽었다.] 각종 국내외 현안들에 통달한 반면 메리는 어려운 학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데다[* 롱사르의 연애시 등 가벼운 작품을 주로 선호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의 귀족 여성들에겐 흔한 경향이었다. ~~일국의 통치자인 여왕이라서 문제지~~] 어린 시절 내내 프랑스에서 살다 보니 [[스코트어]]나 [[스코틀랜드 게일어]]는 당연히 못했고 [[영어]]도 성인이 되어서야 배우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직후 신하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라틴어로 간신히 대화했을 정도였다.] 엘리자베스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때로 국사를 위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절제하기도 했으나 메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자신의 의견이 신하에게 반대 당하면 한나절을 사실(私室)에 틀어박혀 지칠 때까지 울거나 드러눕곤 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의 사후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격하시키고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 버렸다. 후에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와 메리의 왕위 계승권을 복권시켰으나, 적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왕위 계승권은 인정이 되었기 때문에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지만 가톨릭쪽으로부터 [[가톨릭]] 교도인 [[메리 여왕(스코틀랜드)|메리 여왕]]에게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재위기간 내내 왕위를 위협받았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스튜어트와의 약혼이 깨진 뒤 분통을 터뜨린 헨리 8세가 누이 [[마거릿 튜더|마거릿]]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버렸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당시 엘리자베스 1세를 제외하면 가장 신분이 높은 왕위 계승권자는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였다. 어찌되었건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잉글랜드에 머물게 되기까지, 그녀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내내 스코틀랜드와의 사이는 불편했다. 마냥 불편한 사이만은 아니었고 때로는 일시적으로 호전되기도 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여러 번 서신을 주고 받으며 한때 회동을 가지기로 한 적도 있었으나 무산되고 말았고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메리는 스코틀랜드 본토에서 벌리, 월싱엄 등 잉글랜드 내 강경 개신교 세력의 사주를 받은 반프랑스 칼뱅파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잉글랜드로 망명을 오게 된다. 그런데 이전까지 메리를 견제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잉글랜드로 망명하러 오자 나름 혈족이자 같은 군왕으로서의 유대감을 느꼈는지,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히는 벌리와 월싱엄의 주장을 물리치고 계속 거절하며 무려 18년의 세월을 유폐된 것 치고 나름 안락한 생활을 메리에게 보장해 주었다. 벌리 경이나 월싱엄이나 이 시기를 전후로 초상화에서 늙은 점이 확 드러나며, 특히 벌리는 이 대목에서 "여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미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면에서 해석하자면 엘리자베스 1세 또한 막강한 신하들을 거느린 군왕의 입장에 서있었던 만큼, 아무리 위협이 된다 한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군왕을 폐위하고 죽이려고 한다'라는 발상 자체를 굉장히 불쾌하게 여겼다는 해석이 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 사후 그녀만큼의 통솔력을 가지지 못한 스튜어트가의 왕들이 제위하게 되고, 의회와의 반목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잉글랜드 내전]]과 [[찰스 1세]]의 사형이 일어나면서 엘리자베스의 예감은 제대로 들어 맞았다. 결국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왕위를 찬탈할려는 반란을 도모한 혐의로 사형당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아들 [[제임스 1세|제임스 6세]]가 훗날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잇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